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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수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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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견어사 황귀하 선정비 (別遣御使 黃龜河 善政碑)

    別遣御使黃公龜河至誠賑民
    雍正二 年甲辰閏四月建
    옹정(雍正) 2년(1724)에 세워진 별견어사 황귀하의 비문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하여 넉넉하고 풍부하게 백성들을 위해서 성의를 다하여 구제하였으므로 세워진 비

    사상 윤구동 선정비 (使相(牧使) 尹久東 善政碑)

    1817년 속칭 동치못에 세워진 사상(목사) 윤구동의 선정비이다. 윤공(尹公)은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흉년으로 재앙을 당하였을 때 곡식을 사들여 굶주리는 이재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홍효자비 (洪孝子碑)

    효자 홍달한(洪達漢)의 충효행적을 칭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홍 효자가 異世한 후인 영조 25년(1749) 11월 건립된 비.
    홍달한(1666~1749)은 朝鮮朝 현종~영조 연간에 성산읍 고성리에 살았던 사람으로 이 고장 사람들이 홍 효자라고 불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모친 병이 위급해지자 병 간호가 남달리 극진하였다. 모친이 천수를 다하자 3년의 시묘(侍墓)를 하였고 어렸을 때 돌아가신 부친의 상을 追服하였다. 1720년 국상(숙종 승하)에는 다랑쉬(월랑봉)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북향 통곡하며 지극한 애도의 정을 다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3대에 걸친 보상이 내려졌으며 영조 22년(1746)에 왕명으로 통상대부(通政大夫)(정삼품)의 교지(敎旨)가 내려졌으며 그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從二品)의 교지(敎旨)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관직이 내려졌다. 이 정문(旌門)은 오늘날까지 홍효자의 인간된 도리를 밝혀 후세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충혼비 (忠魂碑)

    (우면)
    鳴乎哉라 同志勇士諸君은 大義로 싸우고 忠誠에 죽으니 名譽 山보다 무겁고 功績이 바다보다 깊도다 六.二五 事變운 戰史에 밝혀 있거니와 敵軍의 南侵에 百萬 戰友 總力 集中하여 總擊退를 시켰으니 戰火는 더욱 熾烈하였다. 이 때 勇士 諸君은 憤에 불일고 義慨에 날뛰어 生死 超越한 勇戰敢鬪中 悲極 慘極의 最後로 決絶壯絶의 大韓

    (좌면)
    獨立 萬歲를 高唱하고 千秋 歷史에 꽃다운 이름을 남기면서 드디어 散華하였다 鳴乎壯哉로다 이에 片石을 다듬어 數行 記念辭를 紀錄하여 朝夕來往에 追憶이 새로우려 하며 將來 愛國 志士의 龜鑑이 되며 忠義 精神을 길이 發揮하리라

    고씨 열녀비 (高氏 孝烈碑)

    열녀 고씨는 성산읍 오조리 故 吳公 慶仁의 配位로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청상으로 부모님에 대한 봉양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제주인으로서 의상에 대한 재단과 바느질이 뛰어났으며 특히 제복 등의 재단은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학문을 많이 습득하여 친족들의 참된 사람의 도리를 다하도록 인도하여 훌륭한 가문을 이루었음에 조정에서 효열의 칭호를 받아 그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843년 5월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