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세종 19년에서 21년(1437~1439)사이에 수산진이 설치되어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 진안할망당도 이 때에 생겼다. 성 동북쪽 모퉁이 벽 밑에 진안할망당이 위치하고 있는데 그 유래는 성과 관련이 있다.
성을 쌓을 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부역(賦役)을 하고 공출(供出)을 내는데 유독 한 여인만은 공출을 내지 못했다. 관리가 공출을 독촉하는데 아기가 ‘으앙’하고 울자,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저 아기라도 데려가라고 했다.
공출 관리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 넘겼고 그 후 웬일인지 축성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다. 성을 쌓으면 이유 없이 자꾸 무너지곤 했다. 어느 날인가 지나가던 스님 한 분이 ‘왜 주겠다던 원숭이띠 아기를 받아다가 바치지 아니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때야 공출 관리는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달라고 하니 아주머니는 망설임 없이 내 주었다. 아기를 땅에 묻고 성을 쌓으니 정말 성이 무너지지 않고 수산진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다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동네의 한 부인이 제사를 지내고 퇴물을 그 자리에 갖다 놓으니 아기 우는 소리가 그쳤다. 처음에는 신당으로 모시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영험이 좋아 자녀의 진학, 출세와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많이 찾으며 인근 부락인, 고성리, 오조리 뿐만 아니라 서귀포시, 제주시 등지에서까지 찾고 있다. 그러나 심방들은 당신(堂神)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안동헌은 밖동헌 내동헌 참방할망 옥할망 옥쇠나장할마님은 되(升)지기로 마련하고 흡(合)지기로 마련하여 간간생이 노라왕 이기는 송사(訟事)지게 하고 지는 송사 이기게 하는 할망이우다.’ 라는 사설을 본풀이에 넣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