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5년(1510) 張林牧使에 의해 진성(鎭城)으로 활용되었으나, 선조 30년(1579)에 목사 이경록(李慶祿)에 의해 방호소가 성산으로 옮겨지면서 일시 폐성된 바 있었다. 이경록 목사가 성산은 천연의 험포(險圃)라 하여 삼읍의 군기와 창고를 모두 이곳에 옮기는 한편, 수산방호소를 여기에 이전하여 진무하였다.
탐라지(耽羅誌)는 ‘숙종 32년(1706)에 목사 송정규(宋廷奎)가 조방장(助防將)을 만호(萬戶)로 陞’ 하였는데 숙종 44년(1718)에는 목사 정석빈(鄭碩賓)이 만호(萬戶)를 고쳐서 조방장을 두었다. 여기에는 ‘조방장 1인, 치총(雉摠) 1인, 성정군(城丁軍) 170인, 방군(防軍) 75인, 서기(書記) 7인, 방포수(防砲手) 1인, 방인(方人) 3인, 실인(失人) 7인, 하역선(何候船) 1척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산성은 어느 방호소보다 성 폭이 넓고 동서문이 홍여문으로 축조되어 있었으며, 서문에는 누각이 세워졌던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축조물(石造建築術)의 진가를 짐작하게 한다. 성의 내부에는 병사 및 객사가 여러 곳에 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민가가 있었다. 성으로부터 서남족 방향 300m 지점에 사장 ‘소시’라는 곳이 있는데 군사훈련장이라고 전해진다.
남환박물(南宦博物)에 화북, 수산, 정의 등의 성에서는 정군(丁軍) 조련(操鍊)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