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시대의 탐라에 대한 탐라기년설에 의하면, 고.양.부 三乙那(삼을나)가 탐라국 당시, 벽랑국의 사자가 삼신녀를 데리고 연화포(지금의 온평리)에 도착하자 삼을나가 연령순 으로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다는 전설로 미루어, 이 고장에도 상고 시대부터 인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산리는 1,000여 년 전에 속칭 남다리, 통개남물 및 지금의 臣洞(큰동네) 인근 지역에 고씨, 양씨, 서씨, 임씨 등이 살기 시작하여 점차 생활 여건이 좋은 현재의 수산1리 및 2리에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수산리라는 이명(里名)은 고지의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로는 원래 首山(수산)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부락이 커지면서 인구 가 늘어나고 학숙당(學塾堂이) 설립되었으며, 향교 출입자가 많아지면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양촌으로서의 입지가 굳어지게 되자, 首山 의 '首'는 '우두머리', '처음', '먼저', '머리' 등을 표현하는 반면에 '꾸벅거리다', '魁首自白(괴수자백)' 등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양촌으로서의 양반, 선비가 사는 마을의 이름으로는 부적당하다고 해서 水山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 개명의 경위는 '知人學塾 仁義禮智(지인학숙 인의예지)' 즉 '사람은 학문을 많이 배워 熟達(숙달)함으로써 仁義와 禮智를 안다'. 다시 말하면 어질고 인자하고 예의바르고 슬기로우며 신의 있는 사람이 仁者가 되고 知者가 된다는 말이고 '仁者樂山, 智者樂水 (인자악산, 지자악수)에서 '水' 字와 '山' 字를 따서 水山里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탐라지건치연혁(耽羅誌乾置沿革)에 따르면 충렬왕 26년(1300년)에 제주도를 동서도(東西道)로 나누고 현촌(縣村)을 설치할 당시 수산리는 동도 토산현(兎山縣)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태종 16년 도안무사 오식(都按撫使吳湜)과 전 판관 장합(張合) 등이 사의(事宜)에 따라 제주, 정의, 대정의 3읍으로 분립되어 수산리는 정의현에 예속 되었으며, 광해군 원년(1609년) 김치판관이 동서방리(東西坊里)를 설치함에 따라 제주목에 좌면, 중면, 우면을, 정의현에 중면, 우면, 좌면을, 대정현에 우면, 좌면을 두었는데, 수산리는 좌면에 속했으며, 면에는 도약정(道約正) 약정(約正), 직월(直月) 등을 두었다가 후에 풍헌(風憲), 약정(約正), 농감(農監)을 두었다가 리에는 경민장(警民長), 동장(洞長), 기찰장(譏察將을) 두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침략으로 1914년 제주, 정의, 대정 3군이 폐합되고 전라도 제주군에 속함과 동시에 좌면이 정의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수산리는 정의면 수산리 1,2구로 되었다가 1915년에는 도사제(島司制)실시 에 따라 전라남도 제주도 정의면 수산리 1,2구로 되었고, 구장(區長)을 두었으며, 1933년에 정의면이 성산면으로 개칭되어 성산면 수산리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자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대령을 사령관으로 미군 1개 연대가 진주하고 제주도 지역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스타우트 소령이 군정관이 되고 민간 행정을 담당할 도사에 김문희를 서리(署理)로 임명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 독립을 억누르기 위해 제정 시행되었던 법령을 제외한 일제 법령이 군정 당시에도 그대로 효력을 갖게 되었다. 즉 행정상으로는 제주도가 전라남도에 소속됨에 따라 지방자치제를 염원하는 도민들의 도승격 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도승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력한 결과 10개월 만에 군정 법령 94호(1946. 7.2 공시)로 濟州島를 전라남도에서 분리하여 道로서의 권한과 직무, 기능 및 직제를 구비한 道가 구성되었다. 도명을 濟州道로 하고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으로 나누고 1읍 12면을 관할하고 이를 1946년 8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됨에 따라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수산1,2리가 되었으며 里에 이장을 두었다.
1980년 12월 1일 읍 승격으로 성산읍 수산1,2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양마산지(良馬産地)
耽羅誌의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 3년(1227년) 원에서 본도를 지배할 당시 (1273 - 1368)동서아막(東西阿幕)을 설치하고 다루가치로 하여금 몽고 말 160필을 제주에서 감목(監牧)하게 하였는데, 동아막(東阿幕)을 首山(수산)평에 설치하여 목양과 병참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충렬왕 25년(1300년) 동서도(東西道)에다 10현을 설치했는데, 동도에는 조천(朝天), 별방別坊(하도下道), 돈의(敦義), 수산(首山)에 두어 현감이 다스렸다. 그 때 원의 기왕후(奇王后)가 耽羅赤(탐라적)으로 하여금 소, 말, 노새, 양, 나귀 등을 실어와 首山(수산)평에 방목하고 목자를 두어 감목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말이 크게 번성하여 산야에 가득하였으니 말을 명월포(明月浦)에서 원으로 반출하였다.
이러한 원이 탐라를 지배하면서 1276년에 말 등을 수산평에서 방목할 당시 수산리에는 취락이 형성되고 연못 등이 시설되어 가축을 방목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믿어지고, 수산 1,2리 인근 지역에 방묘, 지석묘 등이 산재해 있으며 석기가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古村(고촌)임에는 틀림이 없다.